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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마닐라 근교 여행지 (2) 안티폴로 여행 소개

by 로은 2026. 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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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닐라 도심의 회색빛 일상이 조금 지겨워질 때쯤이면 근교 안티폴로로 떠나보는 것도 좋다. 따가이따이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산속의 별장 같은 분위기와 미술관, 전망대를 함께 즐길 수 있어서 한가한 주말에 다녀오기 좋은 곳이다.

 

1. 마닐라 근교 안티폴로, 핀토 아트 뮤지엄

안티폴로는 마닐라에서 차를 타고 이동할 수 있는 근교 여행지다. 마닐라에서 출발해 잘 닦인 도로를 달리다가 어느 순간 길가에 간이 집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지역을 지나고, 다시 거대한 주택들이 늘어선 고급 빌리지들을 지나가면 조금씩 분위기가 달라진다. 그렇게 산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핀토 아트 뮤지엄(Pinto Art Museum)을 만날 수 있다.

 

핀토 아트 뮤지엄은 젊은 사람들에게는 사진 찍기 좋은 인스타그램 명소로도 유명하지만, 단순히 예쁜 공간만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은 아니다. 의사였던 Dr. Joven Cuanang이 필리핀 현대미술을 지원하고 소개하기 위해 설립한 미술관으로, 여러 전시 공간을 산책하듯 돌아다니면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내가 처음 방문했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도 일반적인 도심 미술관과 다른 분위기였다. 거대한 별장을 미술관으로 꾸며놓은 것처럼 여러 건물이 정원 사이에 흩어져 있고, 실내와 야외를 오가면서 작품을 볼 수 있다. 하얀 건물과 푸르른 나무가 어우러져서 마치 그리스의 어느 작은 마을에 온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물론 아직 그리스는 가본 적이 없다.)

 

당시에는 필리핀 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내가 생각했던 예쁜 현대미술과는 조금 달랐다. 보니파시오나 마카티의 갤러리에서 봤던 작품들이 세련되고 아름다운 느낌이었다면, 핀토 아트 뮤지엄에서는 빈부격차나 사회문제, 정치와 인간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표현한 작품들이 특히 기억에 남았다. 기독교적인 이미지와 사회비판적인 요소가 섞인 작품들도 많아서 어떤 작품은 조금 기괴하고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림을 하나씩 보다 보니 대학 시절 배웠던 사회와 혁명에 대한 생각까지 떠올랐다. 당시에는 하루하루 밥벌어 먹고 살기도 바빠서 이런 생각을 할 여유가 별로 없었는데, 여행을 와서 미술 작품을 보면서 오랜만에 세상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미술관 안에는 카페와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도 있어서 천천히 둘러보기 좋다.

핀토아트 뮤지엄 전시물

2. 핀토 아트 뮤지엄에서 클라우드9까지

핀토 아트 뮤지엄을 둘러본 뒤에는 안티폴로의 대표적인 전망대인 Cloud 9에도 들렀다. 클라우드9은 마닐라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 공간으로, 안티폴로의 높은 지형 덕분에 도심과 주변 지역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주차를 하고 입장료를 낸 뒤 전망대 쪽으로 올라갔다. 당시 입장료는 50~100페소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오래전 방문이라 현재 가격은 달라졌을 수 있다. 짚라인 같은 액티비티도 있었는데 나는 무서워서 그냥 계단으로 올라갔다 ㅎㅎ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마닐라가 생각보다 훨씬 크다는 것이 새삼 느껴졌다. 평소에는 건물 사이에서 생활하니까 도시의 크기를 잘 느끼지 못하는데, 이렇게 높은 곳에서 바라보니 끝없이 건물이 이어지는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다.

 

안티폴로는 따가이따이에 비해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알려진 곳은 아니라서 내가 갔을 당시에는 한국 사람을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오히려 조금 더 현지 여행을 하는 느낌도 들었다. 마닐라에서 바다나 리조트 여행을 하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이렇게 초록이 많은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았다..

 

거대한 마닐ㄹ ㅏ전

3. 안티폴로 여행에서 생각난 것들

이번 안티폴로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동행한 친구와 깊이있게 이야기를 한 것이다. 안티폴로 여행지와 잘 어울리는 대화였다. 친구는 가톨릭 신앙이 강하고, 다른 사람을 돕는 것에도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나는 종교가 없는 편이라 신앙에서 힘을 얻는다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친구에게 사막에 혼자 떨어져 있다면 가장 필요한 물건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성경이라고 했다. 나는 아마 물이나 휴대폰이라고 대답했을 것 같은데 의외였다. 친구는 신앙을 갖는 것이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삶의 의미를 고민하게 만들어준다고 했다. 그리고 이타적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기적인 본능도 돌아보게 된다고 했다.

 

“신을 믿지 않는다면 인생의 목적은 무엇일까?” 그 질문에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나도 내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기 때문이다. 다들 열심히 일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고,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면서 살아간다. 나 역시 돈을 많이 벌고 싶고 안정적으로 살고 싶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인지 가끔은 고민하게 된다. 친구와 이야기하다 보면 예전에 내가 가지고 있었던 열정이나, 다른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여행은 단순히 새로운 장소를 보는 것만이 아니라, 평소에는 하지 않던 생각을 하게 만드는 시간이기도 한 것 같다.

 

그날 기억에 남는 문장이 하나 있다.

Everything you've ever wanted is sitting on the other side of fear.

두려움의 반대편에 내가 원하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다. 나는 원래 생각이 많고, 시니컬하면서도 감정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어쩌면 내가 시니컬해진 것도 상처받고 실망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나 자신을 보호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안티폴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미술관에서 본 작품들, 친구와 나눈 이야기,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에 대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래도 블로그에 다 써놓고 나니 머리는 조금 가벼워졌다.

 

필리핀 여행이라고 하면 보통 바다에서 수영하고, 호핑투어를 하고, 망고쉐이크를 마시고, 마사지 받는 것을 떠올리기 쉽다. 그런 여행도 물론 너무 좋지만, 가끔은 조용한 근교에서 자연을 보고 미술을 감상하면서 내 생각을 돌아보는 여행도 괜찮은 것 같다. 마닐라에서 조금 벗어나 새로운 분위기를 느끼고 싶다면 안티폴로의 핀토 아트 뮤지엄과 클라우드9을 함께 방문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2021년 11월쯤 다녀온 여행이라 사진도 많지 않고 지금과 달라진 부분도 있을 수 있지만, 오래 지나도 기억에 남는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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